런던의 오벨리스크와 피보험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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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오벨리스크와 피보험이익
  • 한창희 국민대 교수 kgn@kongje.or.kr
  • 승인 2024.01.25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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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제보험신문=한창희 교수] 런던 테임즈강의 웨스트민스터 빅토리아 둔치에는 1878년에 설치된 클레오파트라 바늘이라고 불리는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450년경 이집트 국왕 터트모스 2세에 의해 한 쌍으로 조각되어 원래는 헬리오폴리스에 설치됐다. 이어 다른 한 쌍이 200년 후 라메세스 2세에 의해 건축됐다. 이들은 기원전 12년경 로마인에 의해 알렉산드리아로 운송되어 클레오파트라가 세운 사원에 설치되었다. 이 중 3개는 19세기까지 거의 훼손되지 않았고, 클레오파트라 바늘이라 불렸다.

이 중 하나가 이집트 통치자에 의해 1819년 영국 정부에 기증됐다. 운송비용과 해상 운송 위험으로 인해 1877년까지 그 장소에 있었다. 2번째 것은 1833년 프랑스에 제공되고, 그 즉시 파리로 운송되어 콩코르드광장에 세워졌다. 3번째 것은 영국의 오벨리스크와 한 쌍을 이루는 것으로 미국에 선물로 제공되어 1881년 2월 22일 뉴욕 센트럴파크에 건립됐다. 이 오벨리스크의 운송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보험목적물의 점유자에 의한 피보험이익의 존재가 확립됐다.

해상보험계약의 요건으로 피보험이익이 도입된 최초의 법률은 영국의 1745년 해상보험법이다. 같은 법에 따르면 도박이나 게임으로 피보험이익이 없는 보험은 의도와 목적과 상관없이 무효였다.

피보험이익을 정의하는 다수의 영국판결이 있지만 정확한 것은 없다. 그 이유는 모든 사실관계에 적용할 수 있는 정의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피보험이익의 이해를 위해 현대 피보험이익에서 뿌리와도 같은 판결인 1806년의 루세나 대 크로퍼드 사건과 큰 주목을 받았던 ‘클레오파트라 바늘 사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1795년 5월 10일 영국 전함 스테퍼로는 동인도회사가 고용한 선박과 함께 8척의 네덜란드 선박과 적하를 나포하여 영국으로 운송 준비를 위해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이송하였다. 해상 법원의 감독관은 8월 22일 2000파운드의 보험료로 선박과 적하를 보험에 들었다. 9월 1일, 5일, 15일에 새 선박이 해상위험으로 멸실했다. 1795년 9월 15일 네덜란드 선박의 나포를 허가하는 법령이 시행되고, 9월 20일 4번째 선박이 해상위험으로 멸실하였다. 이들 선박은 외국선박이었기 때문에 1745년 영국해상보험법은 적용되지 않았다. 쟁점은 감독관의 명의로 체결한 보험계약에서 감독관이 피보험이익을 가지는가 여부였다.

엘든 판사의 협의의 정의와 로렌스 판사의 광의의 정의가 내려졌고, 후자가 이후 다수의 영국판결에서 채택되었다. 엘든 판사에 따르면 피보험자는 보험목적에서의 법적 이익 또는 계약상의 권리를 증명하는 것이 요구되었고, 1906년 영국 해상보험법은 이 입장을 채택하였다. 반면 로렌스판사는 피보험자가 보험목적에 대한 소유권 기타 권리를 가지지 아니한 경우에도 재산에 대한 피보험이익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였다.

1992년 무나커사건에서 ‘피보험이익의 존재를 판단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피보험자와 보험목적 사이의 관계가 멸실 또는 훼손의 사고의 경우 지급되는 것에 충분히 밀접한가 여부이다. 사실관계에 따라 관계가 없거나 충분히 밀접하지 않으면, 그 계약은 도박계약이다’이라고 판시한 콜만 판사의 판시가 오늘날 일반적인 피보험이익의 정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루세나 대 크로퍼드사건에서 원고승소 판결이 내려졌고, 다수의견은 선박이 영국에 도착한 후에는 국왕의 법령에 의해 점유권을 가지고, 영국에 도착할 때까지 실제 점유하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 불확정적인 점유유익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즉, 감독관은 자신의 권리로 피보험이익을 가지고, 감독관은 선임되는 순간 수탁자로서 보험에 가입하는 것을 포함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재산의 보호를 위해 필요한 모든 권리를 취득한다고 하였다.

프랑스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 모습.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클레오파트라 바늘 사건에서 오벨리스크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런던으로의 운송은 드라마 같은 사건이었다. 오벨리스크를 런던으로 운송하는 결정을 한 과학자인 에라스무스 윌슨은 토목기사인 딕슨을 고용하였다. 그 운송에 1만파운드(2020년 시세로는 100만 파운드)를 지급하고, 실패의 경우에는 아무 지급도 안하거나 오히려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었다. 이 금액은 비용을 충당하는데 충분한 것으로 고찰되었다.

약 224톤에 이르는 오벨리스크를 발굴하고, 92피트인 철로 된 원통에 포장하여 선박 올가호로 예인되도록 부유선 형태의 선박이 동원됐다. 딕슨에 의해 클레오파트라로 명명된 이 선박은 갑판과 마스트, 조향장치를 가지고 있었고, 6명의 선원이 탑승했다. 딕슨은 클레오파트라의 ‘선박과 물건’에 대하여 전손 담보조건으로 보험가액 각각 1000파운드와 3000파운드인 2개의 보험계약을 체결하였다.

1877년 9월 21일 행해가 시작되고, 10월 14일 비스케이만에서 폭풍우로 인해 표류했다. 이튿날 6명의 자원자가 탑승한 구조선박이 침몰하여 선원 전원이 사망했다. 클레오파트라 선원도 모두 사망하고, 그날 오후 글래스고우 증기선인 피츠모리스호에 의해 구조되어 스페인 페롤항으로 수리를 위해 예인되었다. 피츠모리스호는 구조료를 청구했고, 2만5000파운드로 산정된 오벨리스크의 가액에 기초하여 선주에게 2000파운드, 선원에게 1250파운드를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됐다.

클레오파트라는 예인선 앙글리아호에 의해 예인되어 1878년 1월 21일 런던에 도착하였다. 딕슨은 구조비 2000파운드와 페롤에서의 수리비와 런던으로의 예인비용의 보상을 보험자에게 청구하였다. 보험자는 피보험이익의 결여를 주장하였지만 린드리 판사는 이 주장을 기각했다. 이 사건의 항소심에서는 다른 근거로 보험금청구가 기각되었다.

이 보험계약은 딕슨이 소유한 클레오파트라와 또한 딕슨이 점유하고 그가 지급한 비용의 대상물건, 윌슨이 지급할 보수채권에 대한 담보로서 유치물인 오벨리스크에 대한 것이었다. 판시는 기대이익에 대한 보험이 아니라 딕슨의 실제 재산상의 이익에 대한 보험임이 강조되었다. 이 판결은 보험목적의 점유와 함께 보험목적의 보존에 금융상의 이익이 피보험이익임을 의미한다. 반면 피보험자의 재산에 대해 권리나 이익이 없는 채권자는 이 재산에 대해 피보험이익이 인정되지 아니한다.

상법은 ‘보험계약은 금전으로 산정할 수 있는 이익에 한하여 보험계약의 목적으로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손해보험계약은 경제적인 이익을 계약의 목적으로 하는 것을 규정한 것으로 강행규정으로 해석되고 있다. 여기서 이익은 피보험이익을 가리킨다. 피보험이익에 대해서는 법령상 정의되어 있지 않고, 일반적으로 ‘보험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피보험자가 가지는 이익’, 또는 ‘보험사고의 발생에 의하여 손해를 입을 우려가 있는 이익’이라고 정의된다.

피보험이익이 존재하지 않으면 보험사고가 발생해도 피보험자에게 손해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피보험이익의 요건은 도박과 보험을 구별하고, 이익과 도덕적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보험계약 체결단계에서의 규제의 기능을 한다.

일반적으로 피보험이익은 적극이익으로 소유자이익, 채권이익, 담보이익, 수익이익, 대상이익의 종류로 나뉜다. 소극이익으로는 비용이익(비용을 지출할 수 밖에 없는 이익), 책임이익(법률상, 계약상 책임을 지는 이익)이 있다. 루세나 대 크로퍼드사건과 클레오파트라 바늘사건은 피보험이익에 대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이란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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