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언어에도 봄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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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언어에도 봄은 오는가
  • 김민석 마스턴투자운용 브랜드전략팀장·ESG LAB 연구위원 listen-listen@nate.com
  • 승인 2023.08.01 1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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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의 ESG 오디세이]

“끝이 없는 장마의 시작이었나 봐
시간이 멈춘 것 같아
이 비가 멈추질 않아”

가수 정인이 가진 희소하면서도 특유의 매력적인 탁성으로 뽑아내는 애절한 노래 <장마>의 가사다.

“계속해서 비는 내렸다. 어쩌다 한나절씩 빗발을 긋는 것으로 하늘은 잠시 선심을 쓰는 척했고, 그러면서도 찌무룩한 상태는 여전하여 낮게 뜬 그 철회색 구름으로 억누르는 손의 무게를 더한층 단도리하는 것이었고, 그러다가도 갑자기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는 듯이 악의에 찬 빗줄기를 주룩주룩 흘리곤 했다. 아무 데나 손가락으로 그저 꾹 찌르기만 하면 대꾸라도 하는 양 선명한 물기가 배어나왔다.”

이데올로기의 비극을 보여주는 분단문학의 걸작, 윤흥길의 <장마>에서 가져온 대목이다.

필자에겐 어렸을 때부터 익숙했던 ‘장마’라는 용어. 위와 같이 노래에도, 문학에도 담겨 있던 이 단어가 옷을 갈아입게 될 것 같다. 순우리말인 ‘장마’는 수백 년의 나이테를 갖는 말인데, 기후변화로 인해 본래 의미를 잃어가면서 재정의 및 용어 변경의 필요성이 대두한 것이다. 우기(雨期) 등이 새로운 옷의 후보군이다.

하루는 우산을 들고나가도 옷이 다 젖어버릴 정도로 비가 사방에서 쏟아지고, 다음날에는 찜통더위에 땀으로 샤워를 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던 ‘장마철’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스콜(열대성 소나기)에 가깝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기상학계까지 나서 용어 재정립 논의에 불을 지피게 된 배경이다.

‘장마’가 ‘우기’로 바뀐다면? 기상학적 지식을 다 걷어내고 보더라도, 벌써 어감부터 결이 매우 다르다. ‘우기’라고 하면 동남아 국가들의 축축한 풍경이 연상된다. ‘한국형’이라는 접두어가 붙을지도 모른단다. ‘한국형 우기’. 아직은 정서적으로든 언어적으로든 그저 생경하기만 하다.

올해 다들 처음 접하게 된 ‘극한 호우’는 또 어떠한가? 1시간 동안 강수량이 50mm이고, 3시간 누적으로 90mm를 넘기는 호우를 가리키는 용어다. 이 또한 기존에 많이 쓰던 ‘집중 호우’, ‘집중폭우’로는 지금의 기후현상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기에 새로 고안된 언어다.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기후위기, 이를 설명하는 표현도 함께 더 거칠어지고 있다. 다만 아직 이런 지구적 위기에 대한 우리의 준비상황, 위기의식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듯하다. 올여름 참혹한 비극은 그렇게 반복됐다.

기후변화(Climate Change),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라는 말에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급박함이 온전히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기후변화는 기후비상(Climate Emergency), 기후붕괴(Climate Breakdown) 등으로, 지구 온난화는 지구 가열화(Global Heating)로 대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급기야 지난달에는 ‘역사상 가장 더운 달’이라는 세계기상기구(WMO·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의 진단을 토대로 유엔 사무총장의 섬뜩한 경고 메시지가 나왔다. “지구 온난화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의 시대가 도래했다.”

기후위기는 우리의 삶과 인식 자체를 뒤흔들어 놓고 있다. 미국 국토안보부 차관보를 역임한 줄리엣 카이엠(Juliette Kayyem) 하버드대학 케네디 스쿨 교수는 “재난과 위기는 일회성, 우연한 사건,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기후위기도 마찬가지다. 일상화되고, 되풀이된다. 그의 말마따나 예방뿐 아니라 ‘결과 최소화(consequence minimization)’에도 신경 써야 할 시점이다.

기후위기로 우리는 익숙한 단어를 빼앗길 지경에 놓였다. 위기 대응에 중지를 모으지 않고, 또 면피 목적의 땜질식 처방으로 넘어가는 데 급급하다면? 그다음에 우리는 또 무엇을 빼앗길까? 생각조차 하기 싫은 자문이다. [한국공제보험신문=김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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