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펌, ‘외부’뿐 아니라 ‘내부’의 ESG도 진단해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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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펌, ‘외부’뿐 아니라 ‘내부’의 ESG도 진단해봐야
  • 김민석 마스턴투자운용 브랜드전략팀장·ESG LAB 연구위원 listen-listen@nate.com
  • 승인 2023.03.30 14: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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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의 ESG 오디세이]

[한국공제보험신문=김민석] 한 회사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한다. 편하게 J로 부르기로 하자. J는 일찍이 업계 최초로 ‘사회적 가치 경영’을 선언했다.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사회적 가치도 창출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더불어 사회적 가치 경영을 이행하기 위한 ‘사회적가치위원회(Social Value Committee)’를 신설하고, 구성원의 채용부터 사내 조달과 고객 관계 관리까지 사회적 가치를 두루 고려해 전사적 과제로 내재화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J는 어떤 회사일까? 널리 알려진 대기업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더불어 J는 무려 20여년 전 회사에 공익위원회를 만들었다. 전업 공익변호사 수를 지속적으로 늘리겠다는 계획도 수립했다. 또 세계 최대 규모의 자발적 기업시민 이니셔티브인 유엔글로벌콤팩트(United Nations Global Compact, UNGC)에 업계 최초로 가입했다. 사내에서는 사회적 기업에서 만든 사무용품을 사용한다. 동종업계 최초로 시각장애인을 채용하기도 했다.

J가 발간한 지속가능성보고서에는 최근 입사한 구성원들의 성비, 출신 대학(학부, 대학원), 소수자(장애인, 탈북민 등) 구성원 비율 등이 기재되어 있다. J는 어떤 산업에 속한 플레이어일까?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그룹사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J는 다름 아닌 법무법인, 즉 로펌이다. 아니, 로펌에서 왜 이렇게 ESG 경영에 열을 내는 것일까? 아닌 말로 자기들이 SK그룹도 아닌데 말이다. 해외에서는 ‘고용된 총잡이(Hired Gun)’라는 소리까지 듣기도 하지 않았던가.

J가 로펌임을 인지하고 다시 위의 문단을 읽어보면, 내용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가령 지속가능성보고서의 경우, 국내 로펌에서 현재 J만 홀로 발간하고 있다. (사회공헌보고서를 내는 로펌은 있지만, 지속가능성보고서 발간은 J가 유일하다.)

기업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비즈니스의 핵심적인 동력이 되는 곳도 아니고, 승소만 잘하면 될 것 같은데, J는 왜 그렇게 ESG에 진심일까? 너무도 당연한 얘기 같지만, 로펌도 하나의 기업이다. ESG 실천의 예외가 될 수 없을 터이다.

되레 근자에는 클라이언트들이 로펌의 ESG 이행 상황을 면밀히 체크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로펌 내의 DEI(Diversity·Equity·Inclusion, 다양성·형평성·포용성) 상황을 입찰 제안 과정에 요청하는 것이다. 로펌은 로펌 구성원의 성비를 기입하고, 양성(兩性)의 변호사가 모두 포함된 팀을 조직하는 식으로 대응한다. 이제 ESG가 사건 수임과도 유의한 상관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또 변호사법 조항을 살펴보면, 사실 로펌에 ESG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사항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는 내용의 변호사법 제1조, “변호사는 공공성을 지닌 법률 전문직으로서 독립하여 자유롭게 그 직무를 수행한다”는 변호사법 제2조.

물론 로펌에 변호사만 재직하는 것은 아니다. 회계사, 변리사, 세무사 등 다른 전문 자격증 소지자들도 있고, 특정 분야의 학위를 취득한 전문가 및 컨설턴트 그룹도 있다. 경영관리를 담당하는 행정직도 있고, 공직 생활을 오래한 인물들도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로펌에서 변호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인권 옹호, 사회정의 실현, 공공성 등의 키워드와 로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법을 다루는 조직 특성상 변호사가 아닌 로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높은 수준의 직업윤리가 요구된다.

대기업이나 금융회사뿐 아니라 로펌도 비재무적 요소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영국계 로펌 알렌앤오버리(Allen & Overy)에는 DEI 관련 직무를 수행하는 전문가를 따로 두고 있다. LGBTQ(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퀴어) 직원들이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다양한 인종과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조직 내 여러 직급에 두루 포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기도 하다.

다시 J 얘기로 돌아오자. J 구성원의 명함을 받아본 적이 있다. J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명함, 시니어 고객을 위한 큰 글자 명함을 도입했다. 세심한 배려다. 최근 몇 년 동안 로펌에는 ESG 전문 조직들이 여럿 생겨났다. ‘외부’에 ESG 관련 법률적, 제도적 컨설팅을 해주기 위한 전문 기구다. 이제 로펌 ‘내부’의 ESG 경영도 진단해 볼 시점이다. 로펌은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삼아야 하는 곳이니까. 이렇게 로펌 내부·외부에서 공히 쌓은 신뢰와 평판은 로펌의 건설적인 지속가능경영을 견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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