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보험영업의 꽃, ‘돌방’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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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보험영업의 꽃, ‘돌방’이 진다
  • 김환범 kgn@kongje.or.kr
  • 승인 2022.12.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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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제보험신문=김환범] 예전부터 보험은 인지산업이라 했다. 사람 ‘인(人)’과 종이 ‘지(紙)’의 합성어다. 사람이 종이로 하는 산업, 그게 보험의 오랜 정체성이었다. 필자가 보험업에 발을 들인 20세기 말에는 어떤 자리에서든 인지산업이란 얘기가 빠지지 않았다. 많은 활동량과 수북한 팜플렛, 청약서. 이러한 것들이 보험설계사의 성실함을 증명하는 지표였고 성공의 문을 열 열쇠처럼 여겨졌다.

보험영업은 어렵다. 보험부터 쉽지 않은데 영업은 더 그렇다. 오죽하면 가장 어려운 3대 영업을 꼽을 때마다 빠지지 않으랴. 진입 문턱이 낮아 누구나 쉽게 도전할 순 있지만, 오랜 기간 자리를 지키는 이들은 드물다. 함께 입사해 성공을 꿈꾸던 50여 명의 동기 중 여태 이 업계에 남은 건 필자를 포함해 2명뿐이다. 이를 가능케 한 원동력은 ‘돌방’이었다.

돌방은 개척영업을 말한다.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이다. 선배들은 늘 이걸 강조했다. 어려운 보험영업에서 자리 잡은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아무런 친분도 없는 곳에 무작정 찾아갔고 인사를 하며 명함을 돌렸다. 일과 시간엔 아직 익숙하지 않은 보험상품을 분석하고 약관 공부도 해야 했으니 돌방의 주된 시간대는 야간이었다.

다행인 건 필자가 손해보험설계사라는 것과 소속된 지점이 유흥가, 시장에 인접해있다는 점이었다. 밤이 되면 불이 꺼진 사무실을 나와 불이 켜진 주점, 식당으로 향했다. 상인들의 일과는 그때부터 시작이다. 가방 가득 화재보험 전단지를 넣고 거리를 누볐다. 매몰찬 박대 끝에 내주던 커피 한 잔과 어렵사리 체결한 월납 1만원 남짓 첫 계약이 지금을 만들었다.

본부장이 된 지금 필자는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후배들에게 돌방을 강조한다. SNS나 유튜브로 얼마든지 손쉽게 홍보할 수 있는 시대에서, 투입하는 시간과 노력 대비 생산성이 떨어질 수 있는 돌방을 강조하는 건 꼭 라떼스러운 이유만은 아니다. 쉽지 않은 보험영업의 길을 걸어갈 이들에게 앞으로의 원동력이 될 경험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황당한 소식이 들려온다. 최근 손해보험협회, 생명보험협회가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한 방문판매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핵심은 밤 9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까지 보험영업 방문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오는 8일부터 모든 영업현장에 적용돼 ‘돌방 문화’가 사라질 처지에 놓였다. 현업 설계사로서 차마 실명을 드러내진 못하지만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된 이유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금은 영업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기술이 발달하고 코로나19가 비대면 사회를 촉진했다. SNS 활용에 익숙한 설계사들에게 돌방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방문판매 가이드라인을 두고 별다른 불만이 표출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있음에도 안 하는 것과 아예 하지 못하게 하는 건 큰 차이다. 전자는 선택이요, 후자는 강제다. 비중이 줄었다곤 하나, 돌방을 통해 활로를 열고 있는 설계사들도 존재한다. 사전 동의를 받으면 가능하다는 규정은 현장을 잘 모르는 이들의 발상임이 분명하다. 살갑게 웃으며 인사해도 거절이 태반인데, ‘오늘 밤 보험 팔러 가도 되겠습니까?’란 얘기에 흔쾌히 수락할 경우가 얼마나 되랴.

필자의 조직엔 다양한 설계사가 있다. 60대 후반의 여성 설계사 한 분은 매일 새벽 집 근처 택시회사와 버스 차고지를 들렀다 출근한다. 처음엔 영업이 목적이었으나 어느새 습관이 됐다고 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고 가끔은 보험에 관해 궁금해하는 것들을 알려주거나 보험상품을 안내하기도 한다. 이젠 어쩌다 하루라도 빼먹는 날에는 기사분들이 먼저 왜 안 오셨냐 물어본다.

8일부터는 이런 것도 불가하다. 그저 오전 8시 이전이라서다. 소비자 보호를 위함이라면서 소비자가 불편해하지 않는 경우의 수는 없다. 단 몇 장 분량의 텍스트에는 이처럼 보험영업현장의 수많은 상황이 배제된 채, 천편일률적인 규제만이 담겼다.

돌방은 단순한 영업활동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고 더 돈독해질 수 있게 하는 고차원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소비자의 궁금증을 해결해주거나 보험금 청구에 있어 어려워하는 문제를 도와주는 등 되려 소비자 보호에 가까운 행위가 가장 많이 이뤄지는 것도 바로 이 ‘면대면’ 돌방이다.

덧붙여, 오후 9시부터 오전 8시는 누군가에겐 보호받아야 할 휴식시간이겠으나, 다른 누군가에겐 가장 활발한 일과시간일 수 있다. 새벽시장, 유흥주점 등은 화재보험이 절실한 영역이며 어떤 의미에선 돌방이 가장 필요한 영역이다. 그런데 현장을 모르는, 어쩌면 알고도 무시한 탁상공론이 보험영업의 꽃, ‘돌방’을 위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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