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반성문’ 쓸 준비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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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반성문’ 쓸 준비됐나요?
  • 김민석 마스턴투자운용 브랜드전략팀장·ESG LAB 연구위원 listen-listen@nate.com
  • 승인 2024.04.02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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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의 ESG 오디세이]

[한국공제보험신문=김민석] 회사에서 ESG 세미나를 자체적으로 진행한 적이 있었다. 금융, 물류, 패션, IT, 건설 등 다양한 업계에서 지속가능경영 업무를 맡고 있는 실무자들을 주로 초청했다. 교과서에 박제된 지식 겉핥기가 아닌 보다 살아 있는 경험담을 주고받기 위해서다.

그중 패션회사에서 ESG 업무를 주도하고 있는 한 인물이 마이크를 잡았다. 흥미롭게도 현 직장뿐 아니라 직전 직장과 그 이전 직장 모두 패션산업과 밀접한 곳에서 일한 경험이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지속 가능한 패션의 가능성에 대해 늘 고민해 왔다고 말했다. 업무 차원을 넘어선 철학적 고심이다.

최근 소속 회사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발간을 마쳤다는 그는 ‘반성문’이라는 단어를 툭 끄집어냈다. 생경하게 들렸다. 보통 자기가 속한 기업의 ESG 경영 행보를 ‘자랑’하기 바쁜데 말이다.

반성문에서 더 나아가서 ‘나쁜 놈’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물론 약간의 농을 섞은 것이긴 했다. ‘반성문’과 ‘나쁜 놈’은 패션산업이 환경 오염에 극심한 피해를 주고 있다는 문제의식 아래 나온 표현이었다. 대부분의 옷은 매립되거나 소각되며, 해양 오염, 폐수 발생, 탄소 배출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 방송사에서 버려진 옷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취재해 보도한 적이 있다. 세계 도처에서 배송된 헌 옷들이 가나의 수도 아크라 인근 해안가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모습은 가히 절망적이었다. 디스토피아 그 자체였다. 한국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의류 쓰레기 수출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기도 하니, 마음이 더 무거울 수밖에 없다.

패션산업의 열악한 작업 환경도 만만치 않은 문제다. 2013년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 외곽에 위치한 의류공장 ‘라나 플라자(Rana Plaza)’가 붕괴하며 수많은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망자만 1100명이 넘었다. 9층짜리 건물이 폭삭 무너지며, 당시 그 건물에서 봉제업에 종사하며 힘겹게 생활을 영위해 오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삶도 함께 무너졌다. 참사가 일어난 지 11년이 지난 지금, 의류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 환경은 얼마나 개선되었을까. 특히 국가의 전체 수출액에서 패션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개발도상국의 경우, ‘반성문’을 쓸 환경이 조성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다시 그의 얼굴을 쳐다본다. 자조 섞인 한탄에 그치지 않았음에 희망을 본다. ESG 부서는 더욱 진정성을 갖고 용기 있게 반성문을 쓸 채비를 해야 하며, 환경 피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회사를 이끌고 가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발간 또한 이런 치열한 성찰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ESG 실무가 ‘평가 대응’의 동의어가 되어 가고 있다. 국내외 ESG 평가기관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각종 리포트에는 세계적인 ESG 평가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화려하게 나열한다. 물론 평가를 잘 받는 것도 중요하다. 평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ESG 측면에서 미비점을 찾아 개선할 수도 있고, 회사 차원에서 보다 발전적인 정책을 수립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한다.

다만 이제 각 업계에서 벌어졌던 환경 피해에 대한 반성문 쓰기를 ‘경쟁적으로’ 먼저 시작해 보면 어떨까? 반성문은 비단 E(환경) 영역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S(사회), G(거버넌스) 관점에서도 고쳐야 할 것이 많다.

ESG를 주제로 패션 이야기를 하면 보통 파타고니아를 자동적으로 떠올리곤 하는데, 파타고니아 사례까지 갈 것도 없다. ESG는 ‘업무’이기도 하지만, ‘자세’이기도 하다. 비단 패션산업만 ESG 반성문을 써야 할까? 금융, 제조업부터 건설, IT까지 반성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터이다.

반성할 거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야, 개선의 여지가 있다. 부족한 점도 솔직히 공개해야 한다. 성과를 떠벌리기 전에 반성의 태도를 먼저 보이는 ESG 실무자들이 늘었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들이 작성하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읽고 싶다. 이런 그룹에서 기획하는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싶다. 스스로, 그리고 ESG 실무자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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