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예보험 역사로 본 보험종목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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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노예보험 역사로 본 보험종목의 변화
  • 한창희 국민대 교수 kgn@kongje.or.kr
  • 승인 2023.02.27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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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제보험신문=한창희 교수] 노예보험의 역사는 흥미롭다. 아프리카 경쟁부족 간의 전쟁에서 승자는 패자를 노예로 삼았고, 9세기에는 아랍의 무역상인이 아프리카 연안에서 상품과 노예를 교환하는 무역을 했다. 15세기 유럽의 북아메리카와 중남미 식민지 개척시기에 유럽인들에게 노예무역은 가장 수익성 높은 형태 중 하나였다.

부족 전쟁에서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노예는 부족추장에 의해 유럽과 미국의 무역상인에게 판매되거나 다른 상품과 교환됐다. 범죄자 등도 동일한 방식으로 거래됐고, 일부 무역상인들은 민간인을 납치하여 노예를 확보했다. 최초의 노예집단은 1444년에 현재의 알제리에서 포르투갈의 라고스로 들어왔다. 노예무역은 16세기 말까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독점하다가 영국은 1652년~1657년 사이에 존 호킨스경의 시에라리온 원정을 계기로 이 시장에 참여했다.

영국의 노예무역과 선박‧적하보험

당시 영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달리 노동에 사용할 식민지가 남미와 서인도제국에 없었고, 노예노동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미와 서인도제국에서 스페인과 무역을 목적으로 노예를 활용했다. 노예를 내어주고 대신 금과 은, 보석 등을 대가로 받았다. 17세기에 이르러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스페인을 대체하여 카리브해역에 건설됐다. 이 식민지에서는 농작물, 특히 담배, 설탕, 목화, 쌀, 차, 커피 등 농산물과 기호식품이 풍부했고, 그 생산을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노예제도의 개념은 영국의 청교도정신 등에 반하였지만, 그럼에도 노동력 확보라는 실용주의 정신에 의해 허가됐다. 영국 국왕은 노예무역에 대한 특허독점권을 부여했고, 이를 근거로 1765년 아프리카 해안에서의 노예무역에 대한 제한이 풀렸다. 영국의 노예무역의 거점은 초기 브리스톨이고 이어 리버풀, 그리고 18세기 후반에는 런던이 이어 받았다.

노예무역은 노예를 적재할 수갑, 식량, 물, 창고를 설치한 선박이 영국을 출항하여 아프리카 해안에서 노예상인으로부터 노예를 구입한 뒤, 이를 운송하여 카리브해 연안의 영국식민지에서 판매하여 매도 차익을 얻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노예무역이 성행하자 이를 보조할 노예보험도 생겨났다. 노예보험은 노예운송선박에 대한 선박보험, 화물인 노예의 사망으로 인한 손해를 보장하는 적하보험, 적하인 노예를 운송하고 선주가 받을 운임에 대한 운임보험의 3가지로 구성된다. 노예는 끔찍한 조건 하에서 운송됐고, 선박의 선장은 잔인했으며, 노예와 선원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노예무역보험은 18세기 영국의 표준 SG보험증권으로 보장됐고, 적하보험에 관한 일반원칙이 적용됐다. 보험은 영국에서 선박 또는 적하를 아프리카연안으로 운송하여 그곳에서 자유롭게 거래하고, 미국 또는 서인도제국으로 진행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보장하며, 그 위험은 선박이 24시간동안 안전하게 계류하는 경우 종료됐다.

노예는 적하와 같이 취급되었고, 해상운송도중에 해상위험에 조우하여 선박의 중량을 줄이기 위해 바다에 투하하거나 반란에 가담한 노예를 처단하거나 해상에 투기하는 경우, 악천후 등으로 항해가 지연되어 식량이나 물이 부족하여 사망하는 경우 상인이 입을 손해에 대비하여 보험에 가입했다. 적하보험에서는 내부적인 부패로 인하여 과일이 썩거나 밀가루가 가열되거나 포도주가 변질되는 것과 같은 위험은 보험목적의 성질 또는 하자로 인한 손해항목으로 면책이다. 노예보험에서는 항해도중에 자연사하여 상인인 손해를 입은 경우에는 보험목적의 성질로 인한 손해에 해당하여 면책이었다.

노예보험에는 2가지 우려가 있었다. 첫째는 이 보험은 가입시에 보험가액을 확정한 기평가보험으로 가입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 보험가액은 실제 노예의 평가액을 초과하는 초과보험으로 가입한 후, 부정한 보험금을 편취하기 위하여 노예를 선박밖으로 투기하는 것과 관련한다.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서 발생하는 해상사기행위는 발견하기 어려웠고, 실무상 초과보험은 고착화되어 이를 수정하기 어려웠다. 이와 같이 보험사기에 대한 인센티브가 존재하였다.

둘째 노예가 식량이나 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사망한 경우 피보험자가 보험금을 받지 못했다. 노예의 자연사의 경우 해상위험으로 인한 보험사고를 인정한 사례도 극히 적다. 다만 SG보험증권에 명시적인 문언이 존재하지 아니하여 순수한 사망위험에 대한 보험분쟁을 회피하기 위해 동 보험증권에 ‘해상운송되는 동물의 사망’의 면책조항이 삽입되었다.

노예운송조건을 규제하기 위한 법률이 제정된 것은 1788년이다. 동법은 ‘선박소유자나 선박이 선박위의 노예의 멸실 훼손에 대하여 보험에 드는 것은 위법이다. 다만 해상위험, 해적, 반란, 적국에 의한 나포, 선장이나 선원의 악행, 화재로 인한 파괴는 제외한다. 이 법률에 반하는 모든 보험은 목적이 여하하든 무효이다’고 규정하였다.

이 법률에도 불구하고 당시 보험실무는 악천후 등으로 예상된 항해기간보다 항해가 지연되는 경우 노예의 식량이나 물의 부족 등으로 항해를 견디기 어려워 사망한 경우에는 보험보상이 행해졌다. 이에 로이즈 SG보험증권에 이 위험을 열거위험으로 추가하여 보장하는 노예보험실무가 계속되었다. 1799년 법에서는 이를 시정하기 위해 사망보장에 대한 금지조항이 명확히 규정되었지만, 해상위험의 발생시 노예를 선박밖으로 투기하는 것을 금지하지 못하였다.

노예무역이 폐지되고 노예보험이 무효로 된 것은 1807년법에 의해서이다. 동법은 ‘노예를 거래하고, 취급하고, 운송하고, 환적하는 것에 관한 보험은 금지되고 무효이다’라고 규정하였다. 이를 위반하는 경우 보험당 100파운드와 이에 추가해 보험료의 3배의 벌금을 부과하고, 이를 국왕과 고발자에게 분배하였다. 1811년법은 벌금에 징역을 추가하여 실효성을 증대시켰고, 1824년법은 징역형을 삭제하였으며, 1989년법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노예보험의 쟁점은 오늘날에는 피보험이익에서 논의된다. ‘위험이 있는 곳에는 보험이 있다’라는 격언과 같이 보험담보의 대상은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피보험자가 보험목적에 대하여 가지는 이해관계를 의미하는 피보험이익은 적법한 이익이어야 한다. 따라서 권총 등과 같은 금지물품, 수입금지물품에 대하여 체결된 운송보험계약, 도난보험계약은 사회질서에 반하여 무효이다.

18세기에 주요 보험종목이었던 노예보험의 폐지과정은 시대나 사회의 변화에 따라 유효했던 보험이 무효로 바뀌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예컨대 오늘날에도 미국의 일부 주나 네덜란드 등에서는 대마초 흡연이 합법인 반면, 우리나라는 대마초가 마약류관리법 제58조에 의해 엄격히 관리되고 있다. 또한 미국에서는 총기 소지가 합법이지만, 우리나라는 불법이다. 이에 따라 보험이 국가마다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노예보험의 변천사에서 보험종목의 변화를 읽어보는 것도 흥미롭다.

한창희 국민대 교수
한창희 국민대 교수

노예무역 폐지, 투쟁의 역사

한편, 노예무역의 폐지 동력은 1780년에 설립된 헌법정보협회와 같은 기구, 특히 다수의 종교단체였다. 토마스 클락슨의 1783년 ‘노예제도와 인간의 거래에 관한 에세이’ 등이 출간되었고, 우여곡절을 거쳐 1806년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법률이 시행되었다. 서문에는 동법의 목적을 ‘영국시민이 외국소유의 식민지에 노예를 수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영국에 양도된 미국이나 서인도의 정착지에 노예를 수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영국에서의 노예의 법적 지위에 대해서는 1756년~1788년까지 대법관으로 재직하며 보험법의 기초를 확립한 맨스필드 판사가 관여한 사건으로 유명한 판결이 1772년 ‘서머세트 대 스튜어트’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서 맨스필드 판사는 ‘노예제도는 도덕적 또는 정치적인 어떠한 이유로도 도입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노예제도는 혐오스러운 것이어서 이를 지지하기 위해서 실정법 이외에는 감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따라서 흑인은 석방되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카리브연안의 영국식민지에서 노예제도는 국내법으로 허용됐다. 이에 18세기말 영국식민지의 노예는 80만명에 이르렀다. 식민지법에서 노예는 재산이었다. 예컨대 1731년부터 노예를 포함하여 채무자의 재산은 채무집행을 위해 압류되고 매도될 수 있었다. 1797년에는 영국법으로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1807년에는 노예무역이 금지되었지만, 식민지에서 노예를 매도하고, 담보를 설정하며, 대여하고 유증하는 것이 제한없이 허용됐고, 1820년 1월 1일에서야 금지되었다.

영국식민지에서의 노예제도폐지의 최종단계로서 1834년법은 해방된 노예와 소유권을 상실한 주인의 권리에 관한 중층적인 권리를 부여하였다. 영국으로 입국한 노예는 자유이고, 1834년 8월 1일부터 영국식민지 내의 모든 노예는 견습노동자로 처리되었다. 견습노동자는 주인소유의 토지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 주인소유자 아닌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 기타로 분류되었다. 위의 두 유형은 1840년 8월 1일부터 1주당 45시간으로 근로시간이 제한되었고,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1838년 8월 1일부터 견습에서 해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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