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조개와 인생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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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조개와 인생의 맛
  • 이루나 sublunar@naver.com
  • 승인 2022.10.21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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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보험라이프]
Ⓒ게티이미지뱅크

한국공제보험신문이 ‘2030보험라이프’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2030세대의 보험·공제에 대한 솔직한 생각과 에피소드를 공유하고, 실생활에서 진짜 필요한 보험 및 제도는 무엇인지 함께 고민합니다.

[한국공제보험신문=이루나] 한글날 연휴에 변산반도에 위치한 부안에 다녀왔다. 300km 가까이 되는 거리에 연휴의 첫날이어서 6시간이 넘게 걸렸다. 부안은 주변 관광지가 채석강, 내소사, 곰소 염전 등이다. 여행 가이드북의 소개페이지도 부안은 1장을 넘기기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 부안의 진짜 매력은 따로 있다. 드넓은 갯벌, 그리고 맛조개잡이다.

작년 이맘때 부안에 들렀다. 그리고 갯벌의 매력에 푹 빠졌다. 썰물 시간에 맞추어 갯벌에 나가면 멀리 바다가 뒷걸음치고 있다. 호미로 갯벌을 조심스레 긁어내면 유난히 도드라진 구멍이 보인다. 잽싸게 준비해둔 소금을 뿌린다. 몇 초가 지나면 맛조개가 불쑥 머리를 내민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야 한다. 손끝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길쭉한 맛조개가 쑥 뽑혀 나온다. 손맛이 제법 짜릿하다.

딸아이도 신이 난다. 호미질은 힘들고 어른들이 구멍을 찾아 놓으면 신나게 맛조개를 뽑아간다. 정신없이 맛조개를 잡다 보면 어느새 발밑으로 밀물이 들어찬다. 썰물 2시간, 밀물 2시간, 4시간 정도가 조개잡이의 최적 시간대이다. 밀물은 썰물과 달리 무섭게 달려든다. 파도를 피해 육지로 옮겨가며 서둘러 캐야 한다. 한 바구니 가득 채웠다. 저녁에 잡은 맛조개를 숯불에 구웠더니 꿀맛이다.

올해도 맛조개를 가득 잡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부안행에 나섰다. 펜션 주인은 다음 날 아침 8시가 물때라고 알려준다. 새벽 6시에 나가야 넉넉히 잡을 수 있다. 서둘러 잠을 청하고 눈을 뜨자마자 갯벌로 나섰다.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바닷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달의 인력과 바다의 싸움을 선명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서해 갯벌이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열심히 갯벌을 긁으며 맛조개와 사투를 벌인다. 역시 부안은 맛조개의 명당이다. 곳곳에서 잡히니 신이 난다. 순간 흥을 깨는 쨍한 소리가 실려온다.

“얼른 나가소! 여그가 어촌계 양식장인디!”

갯벌 저 멀리서 한 할머니가 계속 소리를 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스티로폼 부표에 어촌계 양식장이라고 크게 쓰여 있다. 갯벌을 가로질러 긴 밧줄도 처져 있다. 할머니는 여기가 어촌계에서 관리하는 양식장이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민망한 맘에 서둘러 사과하고 밧줄을 넘어갔다. 다행히 건너편 갯벌에서도 바구니 하나를 맛조개로 가득 채웠다. 아이의 뿌듯함과 함께 여행은 잘 끝났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다. 갯벌에도 주인이 있나? 왜 쫓아내지? 부표에 쓰여 있던 어촌계를 검색해 보았다. 어촌계는 어촌의 자생적인 협동 조직체로, 어장 관리를 위한 경제적 공동체 성격을 띤다고 한다. 2022년 해양수산부 자료에 따르면 전국 어촌계는 2000여 개가 산재해 있고, 계원도 1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어촌계는 수협법을 근거로 설립되며 마을 어장에서 독점적으로 채취할 수 있는 법적 권한도 갖고 있다. 어촌계가 관리하는 갯벌에서 무단으로 조개를 캐는 것은 도둑질과 같다. 할머니의 고성이 이제 이해된다.

현대의 어촌계는 마을 어장 관리뿐 아니라 지방 인구 감소와 고령화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어촌의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체험 행사를 주관하기도 한다. 인근 갯벌에서도 어촌계 주관의 유료 조개잡이 체험이 상시 열리고, 때마침 열린 지역 축제에서도 어촌계 사람들이 참여하여 다양한 음식과 지역 특산물을 팔고 있었다. 어촌계는 협동조직이면서 경제조직이고 때로는 문화단체인 셈이다.

어촌계는 공제와 보험 제도와 어딘가 닮아있다. 지역적 특수성, 법적 근거, 가입 자격, 상속 조건 등은 상이하지만 공동의 힘을 모아 위기에 대비하고 재산을 함께 관리한다는 점은 매우 유사하다. 함께 힘을 모아 일상을 헤쳐 나가는 인간의 지혜는 시공간을 넘어 전해진다.

작년을 넘어 올해의 맛조개도 여전히 맛있었다. 이번 맛조개잡이를 통해 인생의 새로운 맛도 배웠다. 세상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많고, 그 선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 노력한다는 사실을. 무심코 선을 넘으면 쓴맛을 보게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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