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산’, 그 언어적 못마땅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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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산’, 그 언어적 못마땅함에 대하여
  • 김민석 마스턴투자운용 브랜드전략팀장·ESG LAB 연구위원 listen-listen@nate.com
  • 승인 2022.10.07 14:2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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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의 ESG 오디세이]

[한국공제보험신문=김민석] 순산. ‘순(順)’조로운 출‘산(産)’. 산모가 아무 탈 없이 순조롭게 아이를 낳음을 뜻한다. 일상에서도 순산을 기원한다며 흔히 쓰는 말이다. 분명 따뜻한 마음을 안고 건네는 언어일 터이다.

다만 가만히 생각하면 토대가 허약한 단어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산고(産苦)를 겪지 않고 아이를 낳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고(苦)’가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아무 탈 없이 순조롭게’라는 어구와 의미론적으로 상치된다. 

물론 우리가 상대에게 순산을 바란다고 말할 때, 그 표현에 담긴 온정의 맥락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도 깃들어 있다. 지금처럼 의료 수준이 높지 않았을 때는,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고 산모가 건강하게 회복하는 것이 그렇게 순조롭기만 한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실지로 한국의 영아 사망률(출생아 1000명당 해당 연도의 사망 영아 수)은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굉장히 높았다. 1955∼1960년에는 1000명당 96명의 비율이었다. 숫자로 보니 더 끔찍할 뿐이다. 

다만 ‘순산’이라는 두 글자에는 10개월 간의 고생과 앞으로 부딪히게 될 육아의 어려움이 온전하게 반영되어 있지 않다. 임신 전후의 복잡다단한 서사를 너무도 간편하게 정리해버리는 거친 단어인 것이다. 순조롭다는 의미의 긍정적 한자어는 산모의 걱정과 불안을 단박에 소거한다. 순조롭다는데, 정색하고 다른 말하기 어렵다.

더구나 출산은 언제나 성스러운 것으로 미화된다. 물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다만 이것이 산모가 경험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정도를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이어지면 곤란하다. ‘엄마가 되는 과정’이라는 식의 레토릭도 산모에겐 버거운 짐이다. 힘든 건, 그냥 힘든 거다. 거기에 자꾸 어떤 신화적 요소를 가미하는 작태를 멈춰야 한다. 

‘출산 누아르’라는 별칭을 얻었던 드라마 <산후조리원>에서 이런 대사를 접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순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순산이 어디 있어? 내 새끼는 죽다 살아났구만.” 산모의 친정어머니 입에서 나온 말이다. 맞다. 어머니의 눈에 아직도 그저 아기 같은 ‘내 새끼’가 죽다 살아났는데, 순산이 얼마나 허황한 말이겠는가. 

‘모성’을 제삼자가 별다른 성찰 없이 쉽게 운운하는 것도 지극히 전근대적이다. 산모는 누군가에게 모성이라는 잣대로 점수를 부여받는 피평가자가 아니다. 임신 과정이 힘들었다고 말한다고 해서, 모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고생은 무슨.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아기 얼굴 보면 싹 잊히는 게 엄마야.” 위의 드라마에서 시어머니가 내뱉은 말이다. 사랑스러운 아기 얼굴을 봐서 행복한 것과 이전의 고생은 별개의 영역이다.

또 모성이 부족하다는 어법도 난센스다. 그러면 모성에 적당한 수준이라는 것은 어디까지인가? 딱 알맞은 정도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면, 부족하니 뭐니 말할 계제가 아닌 것이다. 모성을 체온계로 측정할 것인가? 백번 양보해서 모성이 부족하다고 한들, 그 판단은 당사자가 자체적으로 내리는 것이지, 타인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ESG 경영이 화두가 되면서, 여러 기업에서 여성 사외이사 영입에 공을 들인 적이 있다. 바람직한 변화다. 해외 금융사들을 보면, 연도별로 임직원 성비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곳이 많다. 이 역시 유의미한 행보다. 

다 좋은데, 일상에서 아무런 고민 없이 당연시되는 것들(표현, 제도, 문화 등)에 약간이나마 불편을 느끼고, 이 불편을 사내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것. 나아가서 이 불편한 감정과 생각의 고리를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는 것. 유명한 대학 교수나 변호사 등을 ‘첫 여성 사외이사’라는 외피로 모셔 오는 움직임 이상으로 중요한, ESG 경영의 담대한 출발점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순산. 2음절의 낱말을 다시 읊조려본다. 따뜻한 마음도 분명 읽히지만, 여전히 언어적으로 못마땅한 구석이 발견된다. 순조로움으로 모든 전후 맥락을 거칠게 치환해버리면, 내 동료가, 내 가족이 상처를 받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를 아프게 할 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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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2023-09-17 07:26:34
난산이라는 말은 모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