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역 사고와 남겨진 자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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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역 사고와 남겨진 자의 몫
  • 이루나 sublunar@naver.com
  • 승인 2021.09.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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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보험라이프]

한국공제신문이 ‘2030보험라이프’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2030세대의 보험·공제에 대한 솔직한 생각과 에피소드를 공유하고, 실생활에서 진짜 필요한 보험 및 제도는 무엇인지 함께 고민합니다.   

[한국공제신문=이루나] 후덥지근한 8월 말, 짧은 휴가를 보내고 출근을 위해 선릉역에 내렸다. 아침의 선릉역은 출근에 나선 직장인들로 항상 붐빈다. 눈을 감고 찾아갈 만큼 익숙해진 5번 출구를 나와 회사로 향했다. 지상의 테헤란로에는 수많은 오피스 빌딩들이 키재기를 하며 늘어서 있고, 커피전문점의 알바생들은 아침 일찍 문을 열고 주문받기에 바쁘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직장인들의 무거운 그림자 너머로 배달 오토바이의 부산함과 슈퍼카들의 소란한 배기음이 얽혀 있다. 선릉역의 변함없는 일상이다.

고단한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퇴근길. 회사 동료의 연락이 온다. 늦은 저녁에 무슨 일일까? 업무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전에 일어난 선릉역 교통사고에 관한 링크였다. 정식 기사도 아니고 급히 블로그에 올라온 글이었다. 배경이 익숙하다. 매일 지나는 선릉역 사거리다. 교차로 앞에 끼어든 배달 오토바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덤프트럭이 신호가 바뀌자 출발했다고 한다. 트럭에 깔린 오토바이 운전자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인근에서 사고 현장을 목격한 동료의 말을 빌리면 트럭에서 내린 운전기사의 표정이 아연실색한 흙빛이었다고 한다. 과실의 유무를 떠나 선릉역 사거리는 모두에게 가슴 아픈 공간이 되어 버렸다. 

다음날 선릉역 사고 기사가 수없이 올라왔다. 안타까운 블랙박스 영상이 공유되기도 하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추모 공간의 기사도 실렸다. 서비스 노조가 배달 라이더를 위한 공제 조합을 추진하겠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살펴보니 아직 배달 노동자의 지위도 불분명하다. 지난 20년 서울고용청에서는 배달 운전자를 근로자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을 내놓았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개인사업자 신분이다. 배달 플랫폼 업체와 개별 계약을 통해서 일하는 이가 2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수많은 배달 노동자는 삶의 무게를 오롯이 짊어지고 도로 위를 홀로 달려온 셈이다. 

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가치와 직업을 만들어낸다. 배달 플랫폼의 확산은 손쉽게 배달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도보, 전동 킥보드, 자전거를 통해서 배달을 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만 한정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다.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참여자가 늘어나면서, 배달 속도는 빨라지고 경쟁도 심해졌다. 배달에 따른 사고의 위험과 빈도도 함께 늘었지만 이를 뒷받침할 법과 제도는 예전 그대로다. 되려 배달원의 실시간 위치 추적 기능까지 더해져 업무 스트레스가 가중되고 있다고 한다. 기술의 진화가 모든 인간의 삶에 축복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 

선릉역, 아픈 기억은 빠르게 잊혀 가고,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사람들은 플랫폼을 통한 빠른 배달을 선호하고, 오토바이들은 오늘도 분초를 다투며 위험한 곡예를 벌인다. 공제조합 설립을 통해 배달 노동자의 근로환경이 개선되고, 사고 시의 대응과 보상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바람직한 변화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꼭 가슴 아픈 사고로부터 촉발된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민식이 법, 조두순 법 등 이른바 네이밍 법안들의 이면에는 안타까운 사건과 누군가의 눈물이 담겨 있다.  

우리 가족도 코로나19로 인해 배달 주문이 잦아졌다. 배달 플랫폼에서 몇 번의 클릭만 거치면 이름 모를 누군가의 수고로 한 끼 식사가 따스하고 풍성해졌다. 이처럼 빠르고 편리한 배달 서비스가 누군가의 희생임을 애써 잊고 지내왔다. 이 자리를 빌려 배달 노동자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선릉역 사고로 돌아가신 고인의 명복을 빈다. 가슴 아픈 사고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선릉역에 남겨진 우리들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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