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제 약관, ‘법 따로, 행정 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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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제 약관, ‘법 따로, 행정 따로’
  • 박형재 기자 parkhyungjae@kongje.or.kr
  • 승인 2020.09.22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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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 손해배상 조항 유명무실, 공제조합‧보험사‧사업자 모두 외면
사고 발생시 LH 등 발주처는 보상 못받아…사업자 배상자력에 의존
국토부 등은 법령대로 움직이는지 감시 안 해, 사실상 ‘직무유기’
엔공 등은 ‘고의’ 취급 가능하지만 무관심, ‘공제+보증’ 결합상품 만들어야

[한국공제신문=박형재 기자] 공제조합 특별법과 행정규칙(훈령‧예규‧고시)에 명시된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손해배상’ 규정이 유명무실한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법률에는 용역사업자의 고의로 인한 과실도 배상하게 되어 있으나, 보험사들은 ‘보험의 원칙’을 내세워 과실 손해만 배상하는 상황이다.

엔지니어링공제조합 등 판매공제를 취급하는 공제조합들은 상품 약관 개정으로 고의 손해를 다룰 수 있지만 이를 외면하고 있다. 국토교통부 등은 법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감시하지 않아 직무유기라는 비판이 나온다.

건설기술진흥법 34조에 ‘건설기술용역사업자의 손해배상 및 하자보증’ 조항이 명시돼있다.
건설기술진흥법 34조에 ‘건설기술용역사업자의 손해배상 및 하자보증’ 조항이 명시돼있다.

건설산업분야, 엔지니어링산업분야, 소방산업분야 등 공제조합 특별법에는 공통적으로 “사업자는 용역 수행 중 ‘고의 또는 과실’로 발주청 또는 제3자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끼친 경우에는 배상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또한, “이를 위해 공제 또는 보험에 가입해야 하며, 보험 또는 공제의 종류, 대상 및 방법 등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내용이 명시됐다.

아울러 행정규칙을 통해 이를 구체화하고 있다. 예컨대 국토교통부 고시 제2019-997호, ‘설계·건설사업관리 용역손해배상보험 또는 공제 업무요령’ 제4조(보험 또는 공제의 가입 및 증서제출)를 보면, “발주청은 용역업자가 용역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고의 또는 과실로 당해 용역목적물 또는 제3자에게 손해를 발생하게 한 경우 이의 배상을 담보하는 보험 또는 공제에 가입토록 하고 그 증서를 제출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건설기술진흥법 시행령에 대한 국토교통부 고시의 일부. 이 역시 특별법과 마찬가지로 “용역업자의 ‘고의 또는 과실’에 대한 보험 또는 공제”를 요구하고 있다.
건설기술진흥법 시행령에 대한 국토교통부 고시의 일부. 이 역시 특별법과 마찬가지로 “용역업자의 ‘고의 또는 과실’에 대한 보험 또는 공제”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누구도 고의 손해를 다루지 않는 실정이다. 공제조합의 활동 전반을 규정한 법률과 고시에 ‘고의 손해배상 책임’ 내용이 적혀있으나, 이를 모두 외면하는 기이한 현상이 계속되는 것이다.

사실 보험사들은 구조적으로 ‘고의 손해’를 다루기 어렵다. 사고 발생 시 고의와 과실을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고, 고의 손해를 보장하면 사업자가 일부러 사고낸 뒤 보험금을 타내는 모럴헤저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보험의 원칙 중 하나로 상품 약관에 ‘고의 손해는 보장하지 않는다’는 단서 조항을 두고 있다.

삼성화재(위)와 한화손해보험(아래)의 배상책임보험 약관
삼성화재(위)와 한화손해보험(아래)의 배상책임보험 약관

반면 공제조합들은 고의 손해도 다룰 수 있다. 보증과 보험을 결합한 종합공제 상품을 만들고 ‘고의는 구상한다, 과실은 구상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적어 구상 범위를 제한해버리면 된다. 이렇게 종합상품을 만들면 보험사와 차별화는 물론 공제료 인상도 가능하지만 아무도 시도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고의에 의한 손해가 발생했을 때 책임 공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만일 A건설사가 B손해보험사 배상책임보험에 가입하고 LH 용역을 수주한 뒤 고의 부도를 낸 경우 LH는 손해배상을 받기 어렵다.

LH는 국토부 법률에 따라 보험증서를 받아 용역을 발주했으나, 보험사는 이미 약관에 ‘고의는 배상하지 않는다’고 적어놨기 때문이다. 결국 LH는 A사의 배상자력에 의존하거나 민사소송을 거는 수밖에 없다. 발주청은 법대로 했을 뿐인데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셈이다.

공제조합들은 이제라도 보증과 결합된 특별한 공제계약과 서비스를 만들어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법문(法文)에 부합하게 사업을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보험사의 약관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판매공제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한 국토부 등 공제 유관부처들은 공제조합들이 법령에 맞게 움직이는지 감시해 불필요한 혼란을 막아야 한다. 더 이상 ‘법률 따로, 행정 따로’인 상황이 반복돼서는 안된다.

이석구 위맥공제보험연구소 전문위원은 “현재는 ‘고의’가 법률에서 고시까지 명시되어 있지만 사업자, 보험사, 공제조합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기이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며 “정부부처는 행정 절차를 정비해 ‘법 따로, 행정 따로’인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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