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협동조합 현황과 공제사업의 전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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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협동조합 현황과 공제사업의 전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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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3.0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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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미 교수 (상지대학교 평생교육융합대학 사회적경제학과)

1895년 시작된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이 올해로 설립 125주년을 맞이했다. 국제협동조합연맹 설립을 기념하는 뜻깊은 행사가 오는 12월 서울에서 개최된다. 우리나라도 2012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된 이래 17000개가 넘는 협동조합이 각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공제신문은 국제협동조합연맹의 서울행사를 기념하는 기획으로 ‘한국 협동조합 현황과 공제사업의 전망’에 대해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저명한 협동조합 연구자이며 경제학 박사인 상지대학교 평생교육융합대학 사회적경제학과 김형미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연재 순서
1. 공제회에서 탄생한 협동조합, 전세계로
2. 한국 협동조합운동과 공제
3.함께 만드는 보장, 협동조합 공제운동

[연재2] 한국 협동조합운동과 공제

[한국공제신문=김형미 교수] 유럽에서 탄생한 협동조합은 19세기에 이미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사회운동, 이민, 유배, 식민지배에 따른 제도 도입 등 몇 갈래의 경로가 있었다. 1854년 토리노에서 탄생한 노동자들의 소비자협동조합 매장은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리더 주제페 마치니가 영국 망명시기 로치데일공정선구자협동조합을 방문하고서 이탈리아의 동지들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전파되어 탄생했다. 한편, 미주 대륙에서는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협동조합을 결성했고, 1825년에 데카브리스트 당 사건으로 시베리아에 유배된 이들도 출자해서 식품매장을 만들었다. 20세기 초반 아프리카, 인도, 스리랑카에서 탄생한 협동조합들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도구로서 유입되어 스리랑카에서는 1904년에 영국 법과 같은 협동조합법제가 마련됐다.

한반도에서는 어땠을까. 우선 ‘조합’이나 ‘회’란 개념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정에서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이주하면서 도입됐다. 1904년 4월에 일본인들이 결성한 군산농사조합이 문헌에서 찾은 첫 사례다. 이후 이를 본 따서 사회 곳곳에서 상호부조와 공동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조합들이 수도 없이 탄생하여 이인직의 신소설 『치악산』에는 무당, 판수 조합소도 나온다. 1907년엔 요즘의 신용협동조합, 새마을금고에 해당하는 금융조합이 광주에서 처음 도입되었고 그 발상과 정책은 당시 통감부에서 나왔다. 그래서 국내외의 협동조합 문헌 중에는 한반도에서 협동조합이 탄생한 해를 1907년으로 서술하기도 한다. 제도로서의 협동조합을 따지면 이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협동조합이 제도로서의 기능만 가진다면 사회 진보에 기여하는 역할보다도 권력을 공고히 하고 불의를 강화하는 기능을 더 하게 될지 모른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두 축으로 동시에 발달하던 나라의 협동조합들은 사회진보에 기여하는 역할을 했지만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식민지 종주국이나 독재국가에서 협동조합의 기능은 후자 쪽에 가까웠다. 필자는 협동조합을 대중적 사회운동으로서 더 주목하게 되고, 그래서 협동조합 ‘운동’에 더 방점을 찍고 살펴보게 된다. 그리 보면, 조선 민중의 자주적인 협동조합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기 위한 방편으로 협동조합을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의 무수한 실천에서 시작되어 1920년대에 급속하게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민중의 생활 방위 차원에게 가장 활발한 사회운동이었다. 당시 상황을 신문기사로 추적하다 보면 오늘날 협동조합기본법 시행 후 협동조합의 설립 붐과 겹쳐지는 느낌까지 든다.

일제강점기 협동조합운동의 종착점은 ‘이상촌 운동’이었는데 이는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론 중 이상촌 건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도산은 약 200가구가 현대화된 마을 인프라를 갖추고 공회당과 도서실, 학교와 운동장, 문화시설을 갖추고 경제는 협동조합으로 영위되는 농촌마을, 또는 농촌도시가 궁극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함께 신민회의 지도자였던 남강 이승훈은 이러한 생각을 평북 정주에서 실행했고 민족신문은 방방곡곡의 사례를 취재하여 소개했다. 그 중 하나, 성주군 초전면 봉정동은 32가구 마을인데 청년 세 명이 단합하여 이상촌 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마을에서 먼저 양잠조합을 설립해서 생산을 조직하고 주민들의 자각회를 결성하여 음주도박과 조혼 추방, 문맹퇴치에 힘쓰고 소비조합을 설립해서 대구로부터 직거래 공동구매로 염가를 실현하고 근농공제조합을 통해서는 고리대금 문제를 해소했다. 조합의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조합원들이 밭 900평을 공동경작했고 납세조합도 창립하여 일시납이 어려운 조합원들의 세금을 조합이 분납해주었다(『동아일보』1930.12.02.보도).

“협동조합의 근본정신은 소비대중으로 하여금 직접 원산지에서 싼값으로 구입해다 싼값으로 쓰게 하자는 것이다... 조합원이 균등하게 출자하여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운동은 가장 농민이 많은 조선에 있어서 그 중 리상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1938년에 출판된 함대훈의 소설 『무풍지대』의 한 구절이다. 이 작품 속 주인공 김준은 “조선적인 협동조합을 완성”하기 위해 소비조합부터 계모임, 공동경작운동도 추진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성주군 봉정동의 위 사례와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협동조합운동도 (강점기라도) 일상이 유지될 때 가능했다.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많은 협동조합운동가들은 치안유지법의 검속대상이 되었고 협동조합은 해산되거나 문을 닫았다. 다시 협동조합이 민중의 생활과 지역사회에 기여하게 된 시도는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는 1960년대에 들어서야 지속될 수 있었다. 이 때 신협과 새마을금고, 농·수협이 상호자조금융을 일으켜 농촌에서 고리대금 해소에 기여했다. 강력한 반공 독재국가 체제 속에서 중요한 생산협동조합들은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보호, 간섭을 받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협동조합을 자주적으로 스스로 개선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가늘게 때론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필자도 참여했던『한국협동조합운동 100년사Ⅰ·Ⅱ』(2019년 출간)의 부제가 각각 ‘이상과 시련’, ‘저항과 대안’인 이유다.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 협동조합운동에도 공제회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1920년 4월11일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노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가 창립되었다. 이어 전국 각지에서 공제회관을 설립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개성, 대구, 풍기, 함남 흥상에서 공제회관은 지역 농민에게 강습, 집회, 야학 공간으로 쓰였다. 조선노동공제회는 창립 3개월 만에 서울에서 수해가 발생하자 구호반을 조직하여 이촌동, 마포 조난자들에게 식량 사백여 개를 분배했다(『동아일보』1920.7.11.보도). 간도 용정촌에도 노동공제지부가 있었고 농촌의 소작농, 궁민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하는 근농공제조합이 설립되어 소액대출사업을 실시하였다. 근농공제조합은 총독부가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제도화하여 1939년에는 5500여 조합, 조합원 15만 명, 대출인원은 13만8천여 명이었다. 근농공제조합의 대출에는 농사 및 생활지도도 포함되어 있어 그 원리는 라이파이젠 협동조합과 통한다.

오늘날에는 일제피해자공제조합도 있다.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 기금을 스스로 마련하기 위해서 당사자들과 협력자들이 2009년 6월에 창립하여 그 기금총액이 2011년에 4억원을 돌파했다. 『아이 캔 스피크』의 주인공 이용수 할머니도 조합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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