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와 다양성 그리고 한국의 장 피에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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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와 다양성 그리고 한국의 장 피에르들
  • 김민석 마스턴투자운용 브랜드전략팀 과장/민주평통 자문위원 listen-listen@nate.com
  • 승인 2022.06.07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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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의 ESG 오디세이]

[한국공제보험신문=김민석] “나는 도널드 트럼프가 싫어하는 모든 것의 총체다.” 지난달 흑인 여성으로서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백악관 대변인 자리에 오른 카린 장 피에르(Karine Jean-Pierre)가 몇 년 전 했던 말이다. 그는 흑인 여성이고, 성소수자(LGBTQ)이며, 아이티에서 태어난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이민 가정 출신이다. CNN 기자인 수잔 말보(Suzanne Malveaux)와 동성 결혼을 감행했으며, 입양한 딸도 기르고 있다. 

최근 ‘아시아·하와이 원주민·태평양 제도 주민(AANHPI·Asian American and Native Hawaiian/Pacific Islander) 유산의 달’을 기념해 백악관을 찾은 세계적인 K팝 스타인 방탄소년단(BTS)을 브리핑룸에서 출입 기자들에게 소개한 인물이 바로 장 피에르다. 이제 전 세계가 연단에 서서 복잡한 현안을 차근차근 설명하는 그를 주목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 흑인 여성 이사가 탄생하기도 했다. 100년이 넘는 연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주인공은 미시간주립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경제학자 리사 쿡(Lisa Cook)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경제자문위원회(CEA·Council of Economic Advisers)에서 일한 경험도 갖고 있다.

리사 쿡은 실력 있는 연구자였음에도, 백인 경제학자들이 실질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는 대다수의 유수 학술지에 논문을 등재하는 과정에서 숱한 차별을 경험했다. 실지로 인종차별을 주제로 한 실증적인 논문을 유력 경제학회지에서 찾아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참고로 전체 경제학자 중 흑인 비율은 3% 내외밖에 되지 않는다.  

불과 2년 전 BLM(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이 한창일 때, 저명한 학술지인 ‘저널 오브 폴리티컬 이코노미(Journal of Political Economy)’의 편집장(Lead Editor)이던 하랄트 울릭(Harald Uhlig) 시카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BLM을 이끄는 이들을 공개적으로 힐난했다. 그들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flat-earthers, 이미 잘못이 증명된 이론을 고집하는 사람)’이라고 비유한 것이다. 당시 재닛 옐런(현 미국 재무장관,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하랄트 울릭의 발언을 비판하며 편집장직 사임을 요구했다. 

미국 상원에서 인준을 받게 되는 과정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 사실 리사 쿡을 임명하는 것에 대한 찬성과 반대는 동수에 다름 아니었다. 현재 미국의 상원 의석 총 100석은 민주당(무소속 등 범민주당 성향 포함) 50석, 공화당 50석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 팽팽한 균형을 당연직 상원 의장인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 부통령이 깨버렸다. 찬성 51, 반대 50으로 리사 쿡은 2024년 1월까지 연준 이사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주지하듯 카멀라 해리스는 미국 헌정 사상 첫 여성, 첫 흑인 부통령이다. 전통흑인대학(HBCU·Historically Black Colleges and Universities) 중 하나인 하워드대학교를 졸업했다. 이 학교는 ‘블랙 하버드’로 불릴 만큼 실력과 명성이 있는 학교다.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도 이 학교에서 지적 세례를 받았다. 

200년 넘게 남성·백인 중심이었던 미국 사법체계에 균열을 일으킨 사례도 나왔다. 커탄지 브라운 잭슨(Ketanji Brown Jackson)은 흑인 여성 최초로 ‘최고의 현인’ 9인에 이름을 올렸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대법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공화당 대선 후보를 지낸 밋 롬니(Mitt Romney)마저 그의 임명에 찬성표를 던졌다. 

흑인 여성은 미국 사회에서 여전히 두 가지 핸디캡을 갖고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분투하고 있다. 그럼에도 조 바이든 정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올 4월 초 SNS에 사진 한 장과 짤막한 한 문장의 메시지(“A Cabinet that looks like America”)를 올린 적이 있다. 성별, 인종 그리고 성 정체성마저 다양한 장관, 각료가 모여서 찍은 사진이다. 말 그대로 ‘미국을 닮아(looks like America)’ 있었다. 

한국은 물론 미국만큼 아직 인종 문제가 민감한 주제로 논의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다양성’을 존중하고 보장하기 위한 미국 행정부의 노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ESG가 화두가 된 지금, 주요 대기업과 금융사들은 다채로운 배경의 임직원을 고용할 것을 도처에서 주문받고 있다. 여성 사외이사, 여성 임원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거세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ESG는 주요 국정과제 중 하나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ESG의 갈래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관(官)이든 민(民)이든 할 것 없이 모두 ‘다양성’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야 마땅하다. 한국에도 능력이 출중함에도 여러 제약으로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수많은 카린 장 피에르와 리사 쿡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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