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은 ‘히어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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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은 ‘히어로’가 아니다
  • 이루나 sublunar@naver.com
  • 승인 2021.03.0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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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보험라이프]

한국공제신문이 ‘2030보험라이프’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2030세대의 보험·공제에 대한 솔직한 생각과 에피소드를 공유하고, 실생활에서 진짜 필요한 보험 및 제도는 무엇인지 함께 고민합니다.   

[한국공제신문=이루나] 아버지는 소방관이셨다. 첫째, 둘째 큰아버지도 지역은 다르지만, 소방관으로 근무하셨다. 아버지가 임용됐을 때 3형제 소방관 탄생으로 지역 신문에 조그맣게 기사까지 실렸다고 한다. 필자도 2년 넘는 군 생활을 의무 소방관으로 전환 복무했으니 소방과는 아주 끈끈한 인연이다. 하지만 좋은 추억만 남아있는 건 아니다.

유년 시절 나에게 아버지의 기억은 반 정도밖에 없다. 당시 소방관은 24시간 2교대 근무였고, 아침에 출근한 아버지는 다음 날 아침이 돼야 퇴근하셨다. 온몸에 매캐한 냄새가 밴 채로 돌아오신 날이면 아버지는 아침부터 곯아떨어져 점심 늦게야 일어났다. 의무 소방관으로 소방서에서 지내다 보니, 아버지의 아침잠을 이해하게 되었다. 소방서에는 시도 때도 없이 출동 벨이 울린다. 한밤중에 잠을 깊이 자고 있더라도 벨이 울리면 득달같이 방화복을 챙겨입고 뛰쳐나가야 한다. 출동이 끝나고 돌아오면 사용한 장비들을 점검해야 한다. 부산한 출동이 끝나고 주섬주섬 다시 잠자리에 들지만 언제 또 벨이 울릴지 모른다. 이것이 소방관의 일상이다.

2019년 통계청 발표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평균 수명은 83.3세다. OECD 회원국 중 5위에 드는 높은 수치다. 어느덧 고령화 시대로 접어든 지 오래다. 하지만 소방관으로 국한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예전 수치이긴 하나 2017년 국감 당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12~16년, 5년 동안 사망한 소방관의 평균 사망 연령은 69세다. 당시 정무직의 평균 수명은 82세로 13살 차이가 났다. 소방관은 공무원 중에서도 가장 빨리 단명하는 직종이다. 위험한 근무 환경과 불규칙한 수면 습관을 고려하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5만 명의 소방관, 그리고 함께하는 가족들에게는 가슴 아픈 숫자다.

매년 500명의 소방관이 공무 중 다치거나 순직한다. 하지만 소방관을 위한 보험은 작년에 겨우 출시가 되었다. 그동안 소방관은 이른바 보험 거절 가입 직종이었다. 위험한 직종에 근무하는 이들이 가입하게 되면 보험료 상승이 예상되므로, 보험 회사에서 가입 자체를 막은 것이다. 소방관이 공무 중 다친 것이면 국가로부터 보상받을 길이 있지만, 퇴직하고 나면 보험 하나 없이 살아가게 된다.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소방관은, 정작 본인들의 삶에 닥치는 위험은 피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소방관을 위한 제도들이 점차 정비되고 있다. 17년 소방청이 독립조직으로 분리되었고, 20년에는 지자체에서 제각기 관리하던 조직도 국가직으로 전환되었다. 하나도 없던 전문 소방 병원에 대한 논의도 진전되고 있고, 일선에서 3교대 근무도 자리 잡아가고 있다. 외적으로 소방관에 대한 대우와 제도는 나아지고 있지만, 현장 소방관들의 마음은 어떨까. 양초 위의 불꽃처럼 자신의 몸을 태워 가며, 생명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법과 제도의 틈새 속에서, 아직도 많은 소방관이 질병,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등으로 신음하고 있다. 소방관은 강철 같은 몸으로 악당을 물리치고 건물 사이를 넘나드는 히어로가 아니다. 그들도 소중한 가족의 구성원이며, 누군가의 자식이고, 때론 부모다.

올해 아버지가 칠순이 되신다. 퇴직 후 산림 기능사 자격증을 따기도 하고, 아직도 정정하게 일을 하신다. 가파른 산비탈 밭을 빌려 고추, 고구마, 호박 등을 키워서 한아름 보내주기도 한다. 평생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 죄송스러운 맘도 들지만, 아직은 건강하게 계신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이번 설에는 5인 집합 금지 때문에 찾아뵙지도 못하고, 영상 전화로 세배를 드렸다. 아버지도 늘 건강하라는 덕담을 전해 주신다. 설은 지났지만, 미처 말로 담지 못한 감정을 글로써 전해본다. 아버지.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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